몸이 지치니 정신도 따라 지치는 것 같았다
.
가는 길에 삼릉이 어디있는지 묻는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해버렸다..
내가 가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되는데 말이다.;;;
게다가 포석정에 들렀다가 갈 예정지인데도 말이다.;; -_-;;
다행히 곧바로 길을 찾아가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역시나 외곽지역이라 그런지 도로의 폭이 좁다.
근처에 IC가 있기에 자동차들의 통행량은 꽤 되었다.
그렇지만 시내에서 본 학생들의 무리나 관광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특별히 복잡한 길은 아니라 다행이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걸어가는 길은 지겨우면서 힘들다..
옆에 있는 논들의 모습을 보면 위안을 삼을 수 밖에..
그렇게 힘겨워 할 무렵 포석정 안내판이 보인다. +_+
혹시나 싶어 주위에 있는 버스정류장의 위치도 확인했다.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으며 화강석으로 만든 수구(水溝)의 길이는 약 6m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景哀王) 4년(927) 왕이 후백제 견훤(甄萱)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이 능은 남산의 서북쪽에 해당되는 경주 평야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赫居世王)과 제2대 남해왕(南解王) ,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婆娑王) 등 초기의 박씨 임금 네 분과, 혁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閼英夫人)의 능으로 전해 온다.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겉모습은 경주시내 평지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경내에는 혁거세왕의 제향(祭享)을 받드는 숭덕전(崇德殿)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2km를 걸어오니 또다시 다리에 무리가 왔다. -0-;;
날씨가 더운게 한 몫 한거 같기도 하다.
그래도 힘들게 왔으니 관람을 해야겠지...
입구에 들어서서 안내소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ㅎㅎ
어느덧 스탬프판도 제법 채워졌다. ^^
나무가 크고 많아서 그늘이 펼쳐져있다.
더위 속을 헤치고 왔던 나에게는 사막에서의 오아시스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반갑고 고마웠다. ㅠㅠ
그늘 속의 벤치에 앉아 잠시 더위도 식히고 다리도 주무르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번에 찾아온 오릉은 말 그대로 5개의 릉이다.
근데 5개의 능이 각각 독립되어 구분할 수 있는게 아니라
서로가 붙어 있는 형태라 5개의 언덕형태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휴식을 취한 뒤 릉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입구에서 먼 북쪽 방향은 산책로와 같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진과 같이 수풀만 우거진 곳이였다.
릉을 살펴보고 나오는 길에 조그만 건물이 있었다.
이게.. 아까 본 '숭덕전' 이였다.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조선 세종(世宗) 11년(1429)에 지었으나 선조(宣祖) 25년(1592)에 불탔다. 동왕(同王) 34년(1601)과 광해군 10년(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肅宗) 30년(1704)에 고쳤다. 경종(景宗) 3년(1723) 숭덕전이라 편액을 걸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영조(英祖) 11년(1735)에 고친 것이다.
홍살문(紅箭門) 안쪽으로 영숭문(永崇門)과 숙경문(肅敬門)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인 맞배집이다. 왼쪽에 상현재(象賢齋), 오른쪽에 동재(東齋)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숭덕전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뒤에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이번 경주 여행에서도 국립경주박물관을 들리기 위해 월요일을 최대한 피해서 일정을 잡으려고 했다.
월요일은 휴관이라서.. ^^;;
입장료는 2010년까지 무료이기에 매표소에서 입장 티켓만 받아 들어갔다.
박물관은 경주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알려주기에 경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다.
물론 경주에 있는 관광지를 관람한 후에 들러서..
전시된 유물과 관람했던 관광지를 연결시키면 더욱 좋을듯 싶다. ^^;;
사진에 보이는 곳이 고고관으로 메인 건물이라 보면 된다.
고고관으로 가기전에 우측에 큰 종이 보인다.
이 종이 그 유명한 에밀레종, 성덕대왕 신종이다.
한국근대의 巨鐘(거종)으로 일명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鐘身(종신) 상하에는 肩帶(견대)와 口帶(구대)를 두고 각각 寶相唐草紋(보상당초문)을 彫飾(조식)하고, 鐘口(종구)는 八稜形(팔능형)을 이루어 각 稜(능)따라 연화문을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頂部(정부)에는 龍(용)유와 音筒(음통)이 있어 한국종의 특색을 갖추고 있으며, 견대 밑은 乳廓(유곽)이 네 곳에 놓이고 연화로 陽鑄(양주)된 九乳(구유)가 있다.
종신에는 공간을 두고 撞座(당좌)와 二軀(이구)씩 맞대고 있는 四軀(사구)의 飛天(비천)이, 그리고 一千餘字(일천여자)의 장문을 양주한 종명이 양각되어 있다.
종명에는 신라경덕왕이 父王(부왕) 성덕왕을 위하여 銅(동)12만斤(근)을 들여 鑄成(주성)하려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심에 다음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 同王(동왕) 7년(서기 771년)에 완성했다는 내용이다.
얼마나 맑은 음이 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번 울려봤으면 좋겠다 싶으나 그건 무리겠지?? ^^;;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양이다.
'빗살무늬 토기'
역사공부를 시작하게 되면 앞부분에 배우게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조명 때문인지 붉은 빛을 띄는게 뭔가 있어보인다. ^^;;
토우들이다.
세월이 많이 흘렸음에도 아직 윤곽을 확인할 수 있으니 좋네.. ^^
뭐.. 사람답지 않게 생긴 것들도 있지만 애교로 봐줄 수준.. ㅎ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그 당시 생활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으니 좋은 자료 아니겠는가..
금제새날개모양금관장식
천마총 금관 - 국보 제 188호 -
전형적인 신라금관으로 발굴조사 당시 시신의 머리에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신라시대의 화려한 금속 세공술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일부는 천마총 발굴 당시 나왔던 유물들이라 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천마도'는 경주에 있지 않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단다..
갔었는데..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
전투 때 사용했던 물건들이겠지..
금속으로 만들다보니 녹이 생긴거 같은데.. ㅎㅎ;;
12지신들을 표현하고 있다.
똑같은 주제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 표현방법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용하는 용도와 만드는 사람들의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고고관 관람을 마치고 출구를 나오면 야외 전시품들이 있다.
뭐.. 대충 훑어만 보고 옆에 있는 안압지관으로 이동했다.
안압지 발굴과정에서 나온 것들을 전시해 놓았다.
내부 모습이다.
구조가 조금 특이하다고할까...
가운데에는 복원된 안압지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안압지관의 전시품들은 무덤 출토품과는 달리, 신라시대 궁중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이였다.
금동아미타삼존판불좌상
관람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을 들렀다.
매점에서 식사도 하기에 끼니를 해결했다.
매점안에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교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왠지 나중의 내 모습일꺼라 생각하니.. ^^;;
고고관 옆에 있는 미술관은 들어가지 않았다.
미술관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거부감이 드는건 뭘까..;;;
관람도 마치고 배도 채우고 해서 다음 장소인 오릉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오릉으로 가는 길을 직원에게 물어봐서 알았는데..
더운 날씨에 걸어간다고하니 다소 놀라더라 ㅎㅎ;;;
놀라더라도 어쩔 수 없지.. 가는 버스편도 없고.. 자전거나 승용차도 없으니..
아무튼... 더운 날씨를 뚫고 오릉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관람시간
09:00 ~ 18:00 (토요일·공휴일은 1시간 연장) 09:00 ~ 21:00 (야간연장 개관, 3월~12월 중 매주 토요일) (입장시간: 관람종료 30분전까지)
◆ 휴관일
매년 1월 1일, 매주 월요일(단, 옥외전시장은 휴관일에도 무료개방) (단, 월요일이 공휴일일 때에는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평일에 휴관)
◆ 입장료
- 무료 - 대상: 상설전시관, 어린이박물관, 무료기획전시 (단, 유료 특별· 기획전시 제외) ※ 무료관람이라도 관람질서 유지 및 이용객 안전 등을 위해 '무료관람권'을 발행하므로 무료관람권을 발급받아 입장하셔야 합니다.
◆ 단체관람
초·중·고등 학교에서 단체(30명 이상)로 박물관을 관람하고자 할 경우에 전시품의 보호와 관람질서유지를 위하여 학생단체관람 사전예약을 해주셔야 합니다.
이 석빙고는 조선 영조(英祖) 14년(1738) 월성(月城) 안에 만든 얼음 창고이다.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석실[돌방]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약 1000여 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이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 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영조 17년(1741)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석비(石碑)에는 "경주 부윤 조명겸(趙明謙)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만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현재 석빙고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가 있다.
메밀꽃 단지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석빙고가 보였다.
덩그러니 비석이 하나 서있을뿐이다..
그런데 이게 보물이란다..;;;
무슨 보물을 이렇게 방치하는거야.. >_<
훼손시켜도 한동안 모를정도로 떨어져있고.. 관리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데.. 헐..
석빙고 입구로 가서 내부를 살펴보아도 철책에 가로막힌데다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내부 사진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넓다. +_+
얼음이 얼마나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런 기술을 찾아낸 조상들이 대단하다.. -.-b
석빙고 맞은 편에는 넓은 풀밭과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서있었다.
나무 밑에는 뭔가 놓여져있길래 구경하러 가보았다.
미실이다. +_+
경주에서 '선덕여왕' 촬영을 했다는데..
여기서도 일부 장면을 촬영했나보다.
발호세로 유명한 박재정과 유이의 회상신이 여기서 촬영된 것 같은데...
뭐.. 드라마를 꼼꼼히 보지 않아 확실치는 않으니 대충 넘어가자 ㅎㅎ;;
석빙고를 지나 계속 걸어가다보니 또 안내판이 보인다.
안압지로 가는 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음 목적지로 정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갈 수 있겠다. ^^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숙소를 버스터미널쪽에 잡았기에.. 나중에 탈 버스시간들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으로 갈 곳은 대릉원으로 정했다.
대릉원에는 그 유명한 천마총이 있다.
전날 지나온 곳이기는 한데.. 늦은 시간이라 문을 닫았더라.. ㅎㅎ;
생각보다 거리가 되기는 했지만... 뭐.. 힘든 정도는 아니였다.
9시가 조금 지나 대릉원 입구에 도착했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 그 너른 땅 위에 신라시대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23기의 고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고분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봉분이 있는 무덤 위주로 공원화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출토된 무덤자리와 껴묻거리들이 공개된 천마총은 신라시대 무덤 내부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부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황남대총 등이 대릉원의 대표 고분이고,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사연들, 그 무덤과 무덤 사이를 오가며 마주하는 풍경들이 편안하고 고즈넉하여 사시사철 언제 찾아가도 만족감을 줍니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은 백성에 대한 정성이 높아 다섯 사람의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백성의 애환을 듣게 하였다.
재위23년 만에 붕어하니 대릉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여기서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화강석(花崗石)을 가공하여 기단(基壇) 위에 27단의 석단(石段)을 원통형의 곡선(曲線)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長大石)을 우물정자형[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되어 있다.
정남(正南)쪽의 석단에는 밑으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出入口)가 있어 내부(內部)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고, 이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 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이며 지대석 한변의 길이는 5.35m이다. 신라시대의 석조물로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
이대로 쭉 가면 안압지가 있거나... 안압지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겠지라며.. 즐겁게 Walking!!!
조금 걷다보니 왼쪽에 "황룡사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순간 멈칫...
저기를 들렀다 갈것인가.. 그냥 통과할 것인가..
이왕 온거 가보자.. 라는 생각에 방향을 바꾸었다.
좁다란 길을 따라 걸어가니 양 옆에는 정체 모를 돌 무더기들이 놓여져 있다.
저 돌무더기들이 황룡사지를 나타내는 것인가??
조금 더 걸어가니 안내판이 보인다.
황룡사지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길이 나있기에 들어가본다.
아.. 이곳이 황룡사지이구나..
길 양쪽에 표지판이 놓여져 있어 예전에 어떠한 곳으로 이용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장소만 안내되어있을뿐.. 어떠한 용도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
먼 곳에 있는 표지판은 뭔 글자인지 보이지도 않는다.
전체적인 형태를 안내해주는 표지판도 없고..
그냥 덩그러니 펼쳐져 있는 들판과 같았다.
흰 바탕에 무슨 글씨가 적혀있을까???
서희랑터가 뭐야?? -_-;;
황룡사라면 현재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찰이기도 하다.
비록 유실되어 그 흔적만 확인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대접은 좀 그렇네..
관심있는 사람만 와서 확인하고 가라는 식이다..
친절한 설명과 안내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보물, 국보 이런것이 아니라서 그런건가..
그 옛날 웅장했던 모습을 전혀 떠올릴수가 없다...
현장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단말인가...
안타깝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4년(553) 월성(月城)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에 자장(慈藏)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대 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고려 고종(高宗)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 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원래 황룡사 대지는 25,000평에 달하는 늪지를 매립하여 마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찰의 건물은 남북으로 일탑식(一塔式) 절 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금당(金堂)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이 건물 역시 금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은 4만여 점에 달하며 모두 우수한 작품들이다.
이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수리하였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다.
탑에서 나온 돌 사리함(舍利函)에는 여러 가지 구슬, 가위, 금·은바늘과 은합, 숭령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이 들어 있어, 고려 숙종(肅宗)·예종(睿宗) 연간에 해체·수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석탑 4면에는 금강역사상이 새겨져있다.
사진과 같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흔적만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산성비 때문이겠지.. -0-;;
아무튼 지금 모습이라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문화재 관리가 필요할 것 같다.
안되면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10층석탑 처럼 유리벽으로 막아버리는 것도 괜찮을듯..
어차피 만지면서 관람하는게 아니라서 유리벽으로 막아도 관람하는데 크게 지장없을듯 싶은데..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체(四聖諦)를 뜻한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보면 '원성왕(元聖王) 11년(795)에 당(唐)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다시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 석탑 옆에 왠 우물이 하나 있다.
이름은 분황사 석정이다.
보통 우물은 원형인데 이 우물은 팔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다.
좀 특이하기는 하다. ㅎ
저 팔각모양은 부처님이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란다.
내부의 원형은 원융의 진리를 상징한단다.
팔정도.. 원융의 진리.. 어려운 말이다..
관람하는 사람이 적어 조용히 여유롭게 관람을 마쳤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관광버스가 우루루 들어온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또다시 초등학생들과 어울려 관람할뻔 했다. ㅋㅋ
분황사 관람을 마치고 다음 장소를 생각하는데..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겠다.
가까워보이는 안압지로 일단 장소를 정했지만 지도를 봐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_-;;;
일단 버스가 왔던 방향과 반대로 가면 표지판이 있겠지란 생각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