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 [신라] 김유신 역
이문식 : [신라] 거시기 역
류승룡 : [고구려] 남건 역
윤제문 : [고구려] 남생 역
선우선 : [고구려] 갑순 역
김민상 : [신라] 머시기 역
송창곤 : [신라] 금산병사 역
이광수 : [신라] 문디 역
신정근 : [신라] 김흠순 역
전기광 : [신라] 김품일 역
류승수 : [신라] 김인문 역
강하늘 : [고구려] 남산 역
정규수 : [고구려] 보자왕 역
정석용 : [고구려] 아바이 역
강현중 : [고구려] 을식 역
전원주 : 거시기 엄니 역
이원종 : 연개소문 역
박용우 : 무기 나르는 고구려 병사 역
류승완 : 특공대 장수 1 역
한재덕 : 특공대 장수 2 역
김병만 : 땅굴 보초 1 역
류담 : 땅굴 보초 2 역
◆ 12세 관람가
◆ 별점 : ★★★★ (5개 만점)
오래만에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
그래서 편하게 볼 수 있는 평양성을 보게 되었다.
황산벌에서 백제와의 싸움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평양성에서는 고구려와의 싸움을 보여주었다.
이번 전쟁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울 고구려!!
연개소문이 멋진 포스를 보이며 등장하지만 곧 전사!!!
그 뒤를 이어 남생과 남건, 남산이 전쟁을 이끈다.
하지만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남생과 남건..
당나라와의 협상으로 고구려의 틀을 유지하고픈 남생에 비해..
강한 전투력으로 전쟁에서 적을 격파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보이고픈 남건..
그 방식은 다르지만 고구려를 지키려는 마음만은 같은 두사람..
솔직히 어느 방법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살아서 후사를 도모할지... 끝까지 고구려의 기개를 보여주어야 할지..
황산벌 전투에서 살아남은 '거시기'..
평양성 전투에 차출되어 또다시 전쟁터로 나오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전쟁터..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전쟁일 뿐이다.
무사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바람일 뿐이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고픈 "문디"..
과부가 된 누나들과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공을 세워 출세를 해야만한다.
그렇기에 전쟁터에서 항상 의욕이 넘친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당시 병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가 이 두 캐릭터가 영화에서 많은 비중을 받는것 같았다.
같이 본 누나 말이 "저 둘이 주인공 같다" 란다..
나도 동감가는 부분이다..
이번 평양성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본격적인 전투 앞에 있었던 신경전이라 할 수 있다.
이전 황산벌에서 보여주었던 신경전과 비교해서는 너무 허전하다.
큰 가마솥에서 나와 부른 쌀 노래와 병사빼기가 전부이다.
벌교출신 병사의 구수한 욕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
거시기와 갑순이의 러브모드라...
영화상 맞지 않다고도 볼 수 있지만 나름 재미난 부분들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엔딩에서도
전쟁을 피해온 거시기에게 국가간의 전쟁만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은... 후훗...
영화에서 카메오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전 황산벌에서도 김승우와 신현준의 첩자 모습을 봤을 때의 흐뭇함을 느꼈는데..
평양성에서 땅굴장면에서 김병만과 류담을 봤을 때는 오홋.. ㅋ
거꾸러 매달려 기다리는 장면은 정말 달인답다..
그리고 신라 왕으로 나온 황정민은 정~~말 명배우다.. ^^
그 외에도 박용우, 류승완, 이준익 감독이 나왔다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_-;;;
황산벌과 마찬가지로 이번 평양성에서도
이준익 감독은 신라의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관점에서도 전쟁을 바라보았다.
승자의 시점이 아닌 양쪽의 시점...
그랬기에 유쾌한 장면도 마음껏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전투에서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법..
패자의 모습을 보는 시간은 왜이리 마음이 아픈지...
그리고 황산벌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라는 고구려와의 싸움과 함께 당나라와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일요일 아침에 대회 출전 때문에 일찍 나가는 형을 따라 나도 일찍(8시반쯤?? ㅎ) 나섰다.
일요일 1시에 있을 동아리 동문회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알아봤지만...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이 헌인릉이다..
예전 선정릉에 갔던 기억이 있어서 선택이 용이했다고 봐야할듯.. ㅎㅎ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니 강남, 양재역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었다..
근데 잠을 잤던 형의 집과는 거리가 꽤 되어서 복정역 방면에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이 방법도 미리 알아놓았다. ^^b
3번 출구를 나가서 ⑦ 버스 그림이 있는 곳으로 가서 버스를 타면 된다.
대략 200m도 안되니 부담없다. ㅋ
3번 출구를 나오면 보이는 풍경이다.
우측에는 주유소가 있다.
정면으로 쭉 걸어가면 된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으니 조심해서 길을 건너면 될듯..
드디어 버스 정류장 발견!!!
버스는 408번, 471번이 있다.
아무거나 타면 된다.
내릴 정류장인 헌인릉 버스정류장이다.
내려서 뒤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어가면 헌인릉 표시가 보인다.
돌아갈 때는 앞에 보이는 육교를 건너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면 될듯..
난 강남, 양재역으로 가기에 다시 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갔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이라는 글자가 기분을 좋게한다. ^^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한 500m정도 걸으면 되는듯..
일요일 오전이라 다니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다..
그런데 세워진 차들은 뭐지... -_-;;
가로수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어가는게 걸어갈 맛나게 한다. ^^
2번째 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재실이란다..
처음에는 무슨 건물이려나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아래 사진과 같은 문구가 보였다.
재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란다.
이 곳에 들어서서 사진을 찍을까 하는 찰나에...
안에 계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촬영은 Bye...-0-;;;
이야기를 나눈 분은 헌릉에서 설명을 하시는 분이란다..
이 분께서 간단히(?) 능을 찾을 때 능만 구경하고 갈 것이 아니라...
능을 만들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면을 고려해서 살펴보면 더 도움이 될 것이란다..
그렇기에 능에서 운영하는 해설을 듣는것을 추천해 주셨다..
재실에서의 이야기를 마치고 도착한 헌인릉 입구...
역시나 일요일 오전이라 한산하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그럴지도...
헌인릉을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산책로를 들 수 있다.
왕릉만 볼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산책로를 걸으며 정신수양(?)을 하려했다. ㅎ
산책로도 2개 구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왕 간김에 긴 구간을 갈까 했다.
23대 순조(純祖)
능호 : 인릉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13-1
지정번호 : 사적 제194호
조성시기 : 1856년(철종 7) 10월 11일
능의구성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하여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인릉의 능역에는 곡장 3면, 난간석 12칸, 석양 2쌍, 석호 2쌍, 혼유석 1개,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석인과 석마 각 1쌍, 무석인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과 재실 등이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 12칸만을 둘렀으며, 기타 상설은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팔각등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무석인은 생동감 있는 표정과 힘차고 활달한 조각 기법,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어 조선 후기의 석물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최초의 조영 당시의 것이고, 하나는 고종 때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세운 것이다.
능의역사
순조는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1835년 4월 19일 파주 교하 구후(舊後) 장릉(長陵) 국내에 안장하였고, 능호를 인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풍수지리상의 불길론이 대두되어 천장을 결정하게 되었다.
『철종실록』1855년(철종 6) 1월 18일의 기사에는 "인릉의 능침을 봉안한지 21년이나 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외의(外議)가 서로 논쟁하고 있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어머님께서도 이런 내용으로 하교하셨지만, 일이 지극히 중차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경 등과 상의하여 결정해서 행하려 한다.”로 시작하는 내용의 인릉의 천장에 대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논의가 있은 다음해인 1856년(철종 7) 10월 11일에 인릉은 현재의 위치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 언덕으로 천장되었다. 1857년(철종 8) 8월 4일에는 창덕궁 양심각에서 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같은 해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3대 태종(太宗)
능호 : 헌릉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42
지정번호 : 사적 제194호
조성시기 : 1420년(세종2) 9월 17일 (원경왕후 하관일)
능의구성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능의역사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능원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으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먼저 가까이에 있는 인릉으로 갔다.
역시나 맨 앞에는 홍살문이 있다.
왕릉의 구조는 똑같구나 하는것을 느꼈다. ㅎㅎ;;
홍살문 옆에는 인릉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사진은 인릉의 형태를 보여주는 그림이고... 설명은 그 옆에 따로 있으니.. 궁금하면 직접 가서 보시길... ㅎㅎ
능을 가까이 보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이다.
생각보다 높다;; 그렇다고 많이 높은 것은 아니고.. 생각보다..
역시나 능 앞에 있는 비석들..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 등이 나란히 놓여져 있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문무인석 4기의 생김새가 다르다고 한다.
지금 보이는 방향으로는 4기 중 2기 만이 확인 가능해서 조금 아쉽다는..
책자에 실린 사진으로 만족할 수 밖에...
인릉 관람을 마치고 이동하니 넓은 공간이 보인다.
산책로로 가는 길과 헌릉으로 이동하는 길이 같이 보인다.
헌릉을 먼저 들렀다가 피곤하여 산책로를 포기할 것 같아 산책로부터 가기로 했다. ㅎㅎ
위 사진은 산책로로 들어서서 찍은 사진..
입구에 들어서서 조금만 걸어가니 쉼터가 보인다. ;;
생각보다 가까워서 당황하기도;;
여기서 1코스로 갈 것인가... 2코스로 갈 것인가가 결정된다.
2코스로 가기로 했기에 방향을 살펴보니 엥...
가느다란 천으로 막혀있다...
뭐지...
이런...
태풍으로 인해 산책로가 많이 손상되었나보다..
근데 태풍이 지나간지 쫌 된 거 같은데 아직 복구가 안되었다니... 아쉽다..
아쉬워서 막혀 있는 천 너머로 보이는 2코스구간을 찍었는데..
역시나 경사가 조금 급해진다..
복구가 안된게 너무나 아쉽다.. 2코스를 가려고 했는데...(정말..;;)
2코스가 안되니 자연스레 1코스로 가야겠지..
1코스로 가는 길이다. 완만한 길이 걷기에 좋아보인다. ^^
조용한 숲길을 걷다보니 어느덧 맞은편 갈림길에 도착했다.
여기도 역시 2코스로 들어가는 입구가 막혀있다.
저렇게 막아놓아도 들어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과감히 갈 수는 있을것 같은데...
이제 헌릉이 있는 곳으로 이동!!!
1코스 길이가 대략 600m 정도인데..
경사가 완만해서 그런지 편안하게 걸었고... 걷다보니 좀 짧다는 느낌이 들어 살짝 아쉬웠다는.. ^^;
산책로를 빠져나오니 헌릉이 보인다.
역시 왕릉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비각인데.. 여기에는 보통 비석이 세워져있다.
그런데 안내 책자를 보니 헌릉의 비각에는 신도비가 있다고 한다.
신도비란??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말한다.
현재 조선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태종의 능)과 헌릉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니 희귀한 것 아니겠나..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기에는 조그만 울타리가 막고 있어 힘들다. ㅠㅠ
태종릉(좌)과 원경와후릉(우)
홍살문에서 본 풍경
헌릉의 비각
헌릉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보니 아까 재실에서 봤던 아저씨께서 계셨다. ^^
다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간단히(?) 능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42개의 능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능이 헌릉이라고 하셨다.
다른 능들은 헌릉의 구조에서 제외되거나 변형된 것이라고 하시면서..
헌릉만 제대로 알아보고 가면 다른 능은 안봐도 된다고 하셨다. ^^
그리고 능의 규모 또한 제일 크다고 하셨다..
그러면 태조의 능인 건원릉이 아들 태종의 능인 헌릉보다 작은거야??? ㅎㅎㅎ
이건 다음에 확인해보면 되겠지... ㅋ
태종능
이제 슬슬 나가봐야할 듯 싶어..
아저씨의 강의(?)를 뒤로 한 채 헌릉에서 내려왔다.
나오면서 아까 못 찍은 재실을 찍을꺼라고 해놓고..
그냥 와버렸다. -_-;;
나오는 길에도 여전히 길을 다니는 차는 없다. ㅎㅎ
정말 한가롭게 걷기에는 딱 좋은듯 싶다.. ^^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몸이 지치니 정신도 따라 지치는 것 같았다
.
가는 길에 삼릉이 어디있는지 묻는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해버렸다..
내가 가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되는데 말이다.;;;
게다가 포석정에 들렀다가 갈 예정지인데도 말이다.;; -_-;;
다행히 곧바로 길을 찾아가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역시나 외곽지역이라 그런지 도로의 폭이 좁다.
근처에 IC가 있기에 자동차들의 통행량은 꽤 되었다.
그렇지만 시내에서 본 학생들의 무리나 관광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특별히 복잡한 길은 아니라 다행이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걸어가는 길은 지겨우면서 힘들다..
옆에 있는 논들의 모습을 보면 위안을 삼을 수 밖에..
그렇게 힘겨워 할 무렵 포석정 안내판이 보인다. +_+
혹시나 싶어 주위에 있는 버스정류장의 위치도 확인했다.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으며 화강석으로 만든 수구(水溝)의 길이는 약 6m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景哀王) 4년(927) 왕이 후백제 견훤(甄萱)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